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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의 세상을 바꾼 모더니즘 건축

by riarch 2024.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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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를 만든 시대적 배경

 건축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인 르코르뷔지에. 그의 건축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현대의 건물의 모습에 큰 영향력을 준 건축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르코르뷔지에의 실제 이름은 샤를르 에두아르 장르레로 1887년 태어났습니다. 시계 산업으로 특화된 스위스의 라쇼드퐁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르코르뷔지에는 아버지는 시계 세공업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르코르뷔지에의 형은 음악을 하고 동생은 그림을 그릴 정도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00년대 유럽은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예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산업화로 인해 학교에서는 장인을 육성하는 교육방식만을 고집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각 전공생으로 입학했던 르코르뷔지에는 자연스럽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건축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르코르뷔지에는 파리, 독일, 그리스 등 해외여행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였고, 파리에서 오귀스트 페레를 만나며 철근콘크리트를 접하게 됩니다. 산업화 시대에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에 큰 매력을 느낀 르코르뷔지에는 후에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새롭게 정의하는 인물이 됩니다.

 

사상가의 면모를 가진 르코르뷔지에

 르코르뷔지에는 1919년 에스프리 누보라는 잡지를 창간합니다. 에스프리 누보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뜻의 예술잡지였습니다. 이때부터 필명으로 르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잡지는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도 구독자가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이 잡지를 통해 다양한 건축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 잡지로 큰 관심을 받게 된 르코르뷔지에는 시트로앙 주택’, ‘300만 거주자를 위한 현대도시계획안을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이목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이 계획안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녹지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건물들은 마천루처럼 높이 치솟아 있고, 자동차를 위한 편리한 도로체계가 눈에 띕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계획안은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많은 비판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건축을 향하여’, ‘도시계획’,‘근대 건축 연감등의 책을 발간하며 개혁적 사고 주저 없이 펼쳤고, 프랑스어로 CIAM이라고 일컫는 근대 건축 국제회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산업화 시대에 기계와 과학의 발달을 건축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관적인 예술보다는 정확하고 경제적이어야 하며 질서 있는 미적인 기준에 따라 설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사람의 신체 치수를 기반으로 한 모듈러, 황금비 등의 치수 치계 등 다양한 기준을 만들어 내어 설계에 적용하며, 기존 건축방식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이론들을 만들어 냅니다. 새로운 건축의 5원칙, 건축의 네 가지 구성법 등 이때 만들어진 다양한 이론들은 현재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건물의 형태를 만들어냈습니다.

 

르코르뷔지에와 오귀스트 페레의 건축관 차이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그에게 영향을 준 오귀스트 페레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오브제 적인 면이 있습니다. 두 건축가 모두 철근 콘크리트라는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건물과 도시의 모습은 상당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오귀스트 페레는 기존의 도시의 형상과 가로를 고려하여 건물을 설계했다면, 르코르뷔지에는 땅으로부터 독립적인 계획을 많이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 위니테 다비타시옹입니다. 집합 주거인 이 건물은 바다위에 떠있는 여객선을 모티브로 계획하였는데, 저층부를 모두 필로티로 띄워 공중에 떠있는 형태로 존재합니다. 오귀스트 페레가 설계한 프랭클린 거리 25번지 공동주택에서 가로를 의식하여 테라스를 만든 것과는 대조적인 계획안입니다.

 도시를 대한 방식 또한 서로 달랐습니다. 오귀스트 페레의 피케광장 페레타워 작품을 보면 하나의 건축적 언어로 주변 환경과 조화로운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르아브르 도시재건프로젝트에서도 페레는 기존 블록과 컨텍스트를 가장 중점적으로 고려하였습니다. 반면 르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 ‘Plan vision’ 등의 도시 계획안들은 기존 도시를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하여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과감한 르코르뷔지에의 작품들과 다양한 계획안들을 당시에는 더욱 혁신적으로 느껴졌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비판이 따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사상가적인 면모와 새로운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이전과 다른 모습의 건물들이 만들어졌고, 그 모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건축 역사에 의미 있는 인물로 남아있는 이유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