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설계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취직과 이직이 힘들어지고, 심지어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는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작은 사무소들이 문을 닫는 소식이 들려올 때면 남 일 같지가 않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도 건축학과 입학할 때만 해도 졸업하면 바로 ‘건축가’라는 멋진 타이틀을 달고 내 이름으로 된 건물을 지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와 마주한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차갑고 냉혹했습니다.
9년 차가 된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해줬더라면 덜 힘들었을 텐데" 싶은 순간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막막해하고 있을 후배님들을 위해,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설계사무소의 진짜 업무 현실을 제 경험을 담아 털어놓아 볼까 합니다. 일하면서 현실에 화가났던 포인트와 그 때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한 글이니 여러분의 스트레스를 다스리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현실의 건축은 ‘디자인’이 아닌 ‘법규’와 ‘기능’으로 완성됩니다.
대학 건축학과 커리큘럼은 주로 디자인 중심입니다. 하지만 실무에서 건물을 짓기 위해 디자인을 하는 시간은 전체 과정의 10% 남짓입니다. 나머지 90%는 그 디자인을 실현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로 채워집니다.

- 법규가 만드는 볼륨: 학교에서는 자유롭게 매스(Mass)를 조작하고 보이드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실무에서는 건축 법규와 용적률이 건물의 규모를 결정합니다. 특히 수익성이 중요한 근린생활시설이나 아파트 설계의 경우, 법적인 한계 내에서 최대 면적을 찾아야 하므로 디자인적 제약이 큽니다.
- 기능과 프로그램의 제약: 현실의 건축물은 사용자의 편의와 기능이 최우선입니다. 전시관이나 문화시설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평면 구성이 가능한 프로젝트는 드뭅니다. 대부분은 정해진 프로그램 면적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퍼즐 맞추기’에 가깝습니다.
💡 대처법: 디자인과 기능의 충돌을 스트레스로 여기지 마세요. 제한된 법규와 기능적 요구사항 안에서 최적의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실무 건축 설계의 진짜 묘미입니다. ‘예쁜 건물’을 넘어 ‘실제로 쓰기 편한 공간’을 만든다는 관점을 가지면 실무가 훨씬 흥미로워질 것입니다.
2. 모든 건축물은 ‘건축주의 예산’ 위에서 지어집니다.

학생 때는 내가 건축주이자 설계자였기에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건축 설계는 철저히 자본의 논리 위에서 작동합니다.
- 예산의 한계: 좋은 재료, 고급스러운 디테일, 그것을 실현시켜주는 실력있는 시공자까지 있다면 작품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디자인을 구현시킬 수 있는 예산이 주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 건축주의 자산: 건물은 건축주의 '돈'으로 지어집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진 돈은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습니다. 예쁜 것 보다는 오래 사용 할 때 가치가 있는 것에 투자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대처법: 내 디자인이 막혔을 때, 건축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 비용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 "더 합리적인 대안은 없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세요. 이러한 고민은 오히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합리적이면서도 훌륭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됩니다.
3. 건물은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으로 만들어집니다.

건축물은 사유재산이지만 도시의 풍경을 바꾸는 ‘공공재’의 성격도 가집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지을 수 없고 수많은 허가와 심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 복잡한 인허가 절차: 건축 인허가, 경관 심의, 교통영향평가, BF 인증(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등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 다양한 이해관계자: 공무원, 심의위원, 분야별 전문가 등 수많은 사람이 설계안에 대해 의견을 냅니다. 때로는 몇 달간 공들인 디자인이 심의 과정에서 완전히 뒤집히기도 합니다.
💡 대처법: 내 설계안이 수정되는 것을 ‘실패’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건물을 더 객관적이고 도시적으로 적합하게 다듬는 과정입니다. 비록 당장은 업무량이 늘어나 힘들겠지만, 타인의 시선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내 것으로 만든다면 설계 내공은 확실히 깊어집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현실에 내던져졌던 저의 신입 시절은 막막함 그 자체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디자인하는 것이 설계라고 배웠는데, 정작 디자인하는 시간은 전체업무에 10%도 안된다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9년이라는 시간 동안 깨달은 것은, 그 모든 화나는 순간과 수정 과정이 결국 저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었다는 점입니다.
지금 마주한 현실이 차갑고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그 과정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보세요. 그 끝에는 분명 노련하고 단단한 건축가가 된 여러분이 서 있을 것입니다.